경북의 도정 이야기
4. 대한민국 산업화의 메카 경상북도
중공업과 중공업연구의 중심 경북
중공업의 중심 경북 포항제철 창립으로 대한민국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년~1971년)으로 경부고속도로건설, 중공업육성정책과 함께 철강공업의 전략적 필요성이 인정되어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장기적인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63년에 5개국 8개사의 연 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어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루어졌다. KISA와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1967년 7월에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같 은 해 9월에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 박태준 사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대한중석을 모태로 한 포항제철이 창립되었다. 철강을 일관(一貫)하여 생산하는 포항제철의 생산력 기준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1976년 5월 제2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 조강기준 연산 260만t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550만t 규모의 제3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다. 1981년 2월에는 조강기준 연산 850만t 규모의 제4기 설비확장공사를 준공했는데, 제3기 준공 당시 철강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추세 전망으로 제2제철 공장의 건설계획이 수립·추진되었다. 1987년 5월 조강기준 연산 270만t 규모의 광양 제1기 설비공사가 완공되었고, 1988년 10월에는 동일규모로 제2기 설비공사가 준공되었다. 포항종합제철은 포항의 일관제철소에 이어 광양에 제1·2기 설비를 가동하여 설비능력 확대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어 포항제철은 조강기준 연산 270만t 규모의 광양 제3기 설비확장사업을 1990년 완공하고 조강기준 연산 330만t 규모의 광양 제3기 설비확장 사업을 1990년에 준공하였다. 마지막 으로 조강기준 연산 330만t 규모의 제4기 설비확장 사업이 1992년 완공되어 조 강자급률을 더욱 증가시켰다. 포항제철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시기 세무조사로 인해 박태준 회장이 일본으로 떠나는등 기존체제가 흔들리면서 위기를 겪었다. 박태준 회장은 이후 1997년경 재보선을 거쳐 정계에 복귀하면서 DJP연합의 한 축인 자민련 총재를 역임 했다. DJP연합으로 당선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포항제철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사이 포항제철은 1994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 1995년에는 런던증권거래소에 각각 상장되는등 기업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1998년 7월 3일 정부는 정부 및 산업은행의 보유주식지분 26.7%를 1인당 3% 한도로 내·외국인에게 분산 매각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 및 산업은행 지분은 차례로 매각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 10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를 매각함으로써 포스코는 민영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002년에는 공식 회사명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에서 포스코로 변경하였다. 2013년 12월 23일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찔레곤에서 연간 300만톤 규모의 용광로에 첫 불을 지피는 ‘화입(火入)식’을 개최했다. 1973년 6월 포항 영일만에 용광로를 가동한지 40년 만에 첫 해외 용광로가 가동했다. 이는 포스코가 해외 최고 수준의 철강회사로 거듭났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성과는 포스코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철강 산업 발전의 역사이며, 경북이 산업근대화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공업 기반의 연구거점으로 도약하다 경상북도는 포항제철 건립으로 철강 산업의 도내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면서 1986년 중공업기반의 연구거점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포항공대학교를 개교했다. 포항공과대학교(이하, 포항공대, POSTECH(포스텍))는 국내 최초 연구 중심대학으로 사회와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 1986년 설립되었다. 당시 포항제철 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는데, 초대 총장이었던 김호길 박사가 당시 포항제철 회장인 박태준 회장을 설득하여 과학기술 분야에 관한 국내 최고 대학을 지향하여 설립했다. 개교이래 포항공대 입학성적은 계속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했던 1994년 2차 수능 수석이 입학하기도 했다. 뛰어난 교육 환경과 장학금 지원 등으로 그 후로도 꾸준히 입학성적이 상승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는 지금과 비슷한 사회적 입지가 형성되었다. 설립 당시 포항공대의 운영주체는 포항제철이 출연하여 설립한 학교법인 제철 학원이었다. 이후 1995년 12월 1일 포항공대의 운영주체(법인)가 학교법인 제철 학원에서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으로 변경되었다. 학교법인 제철학원은 포항공대 외에 다른 학교들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포스코 측은 포항공과대학만을 운영할 학교법인을 따로 설립하였다. 당시 포스코는 30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출연 하여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포항공대는 학교법인 포항공과대학교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포항공대의 과학기술분야의 연구 실적은 국내 최상급 수준을 자랑한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학교임에도 국내 유명대학의 연구 성과에 비해 총량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분야가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생명과학과 재료과학 분야는 특히 유명하다. 2020년 11월 기준 70여 개의 교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국가과학자 두명을 포함하여 국가적 규모의 각종 연구 사업을 진행하는 교수는 전임교원 기준 270 명이다. 연간 총 연구비 2000억 원 내외, SCI게재 논문 수는 매년 1500편 내외, 특허출원 300~500건 내외(등록 200~300건 내외)의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그밖에도 포항공대의 부설연구소인 포항가속기연구소는 포항방사광속기를 운영하고 있다. 방사광가속기는 국내에 경주·포항에 있는 입자가속기다. 방사광가속기 설치는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이 1987년 4월 로렌스버클리 연구소에 방문 하여 연구소 측에 관련 자료 제공을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김호길 총장의 요청은 당시 거절당했는데, 미국의 과학기술이 타 국가를 앞서야 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호길 총장은 고주파시스템 분야에 전문가들인 포항공대 교수진을 차출하여 가속기 제작을 추진하였다. 1988년 4월 1일 방사광가속기건설추진본부가 발족되며 본격적인 사업이 추진됐다. 국내 최대이자 최초의 방사광 가속기를 제작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이기에 타 연구소, 이과 학연구소, 로렌스버클리 연구소로 파견을 나가 맡은 분야의 개념설계를 수행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설립은 1988년 박태준 포항제철(POSCO) 전 회장과 포항공대 김호길 전 총장이 포항방사광가속기(Pohang Light Source) 건설 프로젝트를 창안하여 전체 건설비(약 1500억 원)의 60%를 포항제철이 부담했으며 나머지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다, 방사광가속기 설치로 포항가속기연구소는 1994년 12월 24일에 전자에너지 20억 전자볼트와 300㎃가 넘는 전류로 첫 운전에 성공함으로써 시운전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1995년 9월부터는 국내 및 해외 이용자에게 빔타임을 개방하여 지원해오고 있다. 또한 2000년부터는 전자에너지를 25억 볼트로 운전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국가공동 거대연구시설운영하고 있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거대과학”(Big Science)의 출현이라는 점 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 역사 이래 단일 프로젝트로 규모가 가장 큰 과학기술 사업으로 포항방사광가속기를 완공하여 운영함으로써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항방사광가속기는 국내 과학의 메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의 발전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수립하다 1969년 정부가 최첨단산업인 전자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 정부는 이 계획을 토대로 정부는 전국 각지를 대상으로 전자공업과 중화학 공업을 육성할 최적의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수자원개발공사는 당시 4대강 유역조사업 자료를 토대로 경상북도 구미를 산업기지 조성에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는 6·25전쟁 후 완전히 피폐하였던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4·19혁명과 5·16정변을 거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력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개발의 지속가능성에 한계를 느낀 정부는 수출지원에 중점을 두는 경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했다. 정부의 수출지원 정책으로 1960년대 수출은 10년 동안 23배 증가하는 가시적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이러한 수출 증가에도 불구하고 가공무역을 통한 외화획득 비율 저하, 수출상품의 단순성, 첨단기술 부재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수출정책은 양적 측면에서 질적 측면으로 변화가 요구됐다. 앞서 일본이 1964년 올림픽 이후 전자산업 육성으로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는 것을 지켜본 한국은 더욱 더 전자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최첨단산업인 전자공업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1970년대 초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한 선진국들의 무역장벽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정부는 1968년 12월에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하고 뒤이어 1969년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의 3대 목표는 95개 주요 품목 개발, 1976년 수출 4억 달러 달성, 140억원의 진흥기금 조성 등이었다. 계획의 1단계(1969∼1971) 기간에는 저항기, 콘덴서등 기본 전자부품 17개 품목을 포함해 62개 품목을 개발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2단계(1972∼1976)에는 전자 계산기, 실리콘 적층 등 33개 품목을 개발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 같은 1960년대 말 정부 주도의 전자산업 육성책 수립과 시행은 6·25전쟁 후 외국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가공 조립 수준에 그쳤던 한국 전자산업을 세계 최강 반열에 올려놓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구미공업단지를 조성하다 정부는 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69년 1월 3일 구미공업단지 설립 추진대회를 시작으로 구미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공단)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 미공단 조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해당 지 역출신 상공인들과 유지들이 자신들의 고 장에 공단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 졌다. 1969년 1월 3일에는 ‘구미공업단지설립추진대회’가 열렸고 같은 해 6월 4일 건설부 고시 제321호로 공업단지 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구미공단이 확정 되었다. 구미공단 제1단지는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과 산동면, 칠곡군 석적읍 일원에 걸쳐 있는 국가산업단지에 조성되었다. 구미공단 조성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구 미1공단 조성은 처음부터 2개의 사업 주체가 구심점이 되어 시작되었다. 즉 섬유 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단지는 경상북도가 주체가 되어 1970년 1월 1일에 제 정된 「지방공업개발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고,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전자단지는 한국전자공업공단이 주체가 되어 「전자공업육성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다. 구미 공단이 조성된 것은 도심 가운데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용수공급에 유리한 자 연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낙동강변이 대부분 넓은 평야로 되어 있어 산업시설기반이 조성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는 점도 이유였다. 정부는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반도체 및 컴퓨터와 같은 고부가가치의 기술집약적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77년부터 구미국가산업 제2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73년 제1차 유류 파동은 제1단지 입주 업체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 고, 당시 입주 예정이던 삼성전자를 비롯한 여러 업체들은 불경기를 이유로 입주를 포기하기까지 했다. 이에 부가가치가 높은 전자공업 육성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1974년 상공부는 구미공단 입주 업체에 대한 조세 감면을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전자업종을 포함한 40개 수출전략산업을 집중 육성하 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1976년에는 제1단지의 낙동강 건너편인 임수동, 황상동, 구포동 일대에 제2단지의 조성을 결정했다. 제2단지는 1977년 7월 19일 에 착공했으며, 당초 1980년까지 완공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공사 도중 경기침 체와 물가상승 등으로 투자 여건이 악화되는 등 악재가 작용하면서 예정보다 10개월 늦어진 1981년 10월 10일에 일부 미조성지구를 남겨둔 채 마무리되었다. 총 조성비용은 114억여 원이었다. 2단지 조성은 금성반도체㈜ 등의 입주와 대기업의 전자부품협업단지가 조성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은 반도체 및 컴퓨터와 관련한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시켰고, 금오공과대학 및 구미직업훈련원과 같이 인력양성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에도 불굴하고 구미 국가산업단지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3저 현상(원유가격 하락, 달러화 가치 하락, 국제금리 인하)에 따른 경기 호전으로 공장용지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87년부터 제3단지가 조정되었다. 제3단지에는 삼성코닝, 금성사(현 LG 전자), 삼성전자 등 반도체, 컴퓨터, 전자기계 업종의 업체를 중심으로 유치하였 다. 특히 1989년에 입주한 삼성코닝㈜은 종전까지 수출에 의존하던 제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연간 2억 6천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왔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미산업단지는 LCD, LED, 모바일 등 업종의 변화를 겪으며 더욱 활발한 세계적인 전자산업의 메카로 도약하게 되었다. 제4단지는 1998년 착공, 2011년 2월에 준공되었다. 205만평의 면적을 자랑하며 이중 28만 평은 외국인 전용단지이며, 제5단지는 2020년 현재 조성중이며, 전자, 정보기기, 메카트로닉스, 신소재 개발을 위해 조성된 단지이다.
천연자원의 활용과 쇠퇴 그리고 도약
‘썅용양화’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대표사업으로 자리잡다 61년 전통을 가진 쌍용양회 문경공장은 전쟁이후 1957년부터 본격화된 경제개발에 따른 시멘트 수요 증가로 인해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지원으로 건 립된 내륙형 시멘트공장이었다. 1953년 UNKRA 자금을 배정받아 예비 기초조사 를 진행하여 부지를 물색하여 경상북도 와 충청북도 경계 부근인 문경공장이 선 정되었다. 1955년 네덜란드 스미스 사에서 건설공사를 착수, 1956년 12월 대한양회(주)에서 공장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1957년 9월 26일 문경공장 준공식을 갖고 가동되다가 1975년 1월 쌍용양회(주) 에서 공장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문경공장은 1975년 1월 쌍용양행으로 흡수 합병됨에 따라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쌍용양회의 막대한 투자를 통해 광산개발과 함께 운영방식의 변경과 및 축적한 기술 적용으로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원가를 절감하였다. 이후 양회 문경공장은 1970년대 에서 1990년대까지 한때 국내 시멘트 수요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시설 노후화와 생산성 저하, 수요 감소 등으로 2018년 6월 폐업했다. 2018년 6월 쌍용양회가 문을 닫은 후, 문경 일대 지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문경시는 낙후된 신기동 쌍용양회 일대 재생을 위해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본격화 했다. 경상북도는 2020년 8월 28일 쌍용양회(주) 문경공장에서 문경시와 한국서 부발전(주), 영남에너지서비스, 한국광해관리공단과 ‘도시재생뉴딜사업 신에너지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일환으로 체결된 이 협약은 지역 에너지 자립률 제고와 도시가스 미공급 지역의 공급 망을 구축하는 ‘신에너지(연료전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경상북도와 문경시는 UNKRA 산업유산인 쌍용양회(주) 문경공장의 장소적 특수성을 활용해 문경컬쳐팩토리, 청년예술가 스튜디오, 익스트림 스포츠 테마파크 등 차별화된 산업거점을 육성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경북 문경탄천지대가 문화시설로 재도약하다 1980년대까지 석탄 산업은 우리나라에서 난방과 취사 원료를 공급하는 주요 에너지원 역할을 맡아왔다. 때문에 2011년까지 전국에 걸쳐 총 400개소의 탄광이 개발되어 약 24,295천 톤을 생산하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주요 석탄 산업은 강원도 태백시, 삼척시, 경북 문경시 등 지역이 주로 개발 되며 산업도시를 형성했다. 이 중 경북 문경의 탄천지대는 1938년 일본인이 개발한 은성탄광에서 출발했다. 해방 이후 대한석탄공사에서 은성탄광을 인수하여 운영하다 석탄산업합리화사업에 의해 1994년 폐광됐다. 1999년 폐광 이후 은성탄광은 석탄산 업합리화사업단에서 건립해 문경시가 운영 중인 문경석탄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문경석탄박물관은 2009년 8월부터 7개월간에 걸쳐 리모델링을 한 문경석탄박물관은 탄광장비 재배치와 탄광촌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전시부분을 확대했다. 또 한 탄광사무실, 광부복장, 굴진·채탄, 선 탄장의 전시와 함께 중앙 계단에 설치된 광부의 얼굴사진 조형물을 통해 당시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외에도 광물·화석 코너와 탄광별로 생산된 석탄및 탄광촌 이야기 코너도 구성해 탄광촌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했다. 문 경시는 석탄박물관의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 및 전시를 통해 문경 탄천지대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경상북도 미래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다 경상북도는 2013년부터 대(代)를 이어 30년 이상 전통산업을 영위하는 사업 체를 ‘향토뿌리기업’으로 지정하고 옛 모습을 간직한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을 ‘산업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은 향토뿌리기업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인 영양군 ‘영양막걸리’ 양조장으로 1926년에 지어져 100년 가까이 운영 중이다. 건물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내부의 낡은 책상과 술을 만들때 사용하는 발효제인 누룩을 담는 상자 등도 옛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1926 년 영양에 전화가 10대뿐이었는데 그중에서 이 양조장이 여섯 번째로 전화를 개통할 만큼 번성했다. 당시 전화는 군청이 1번, 경찰서가 2번 등 관공서가 1번부터 5번까지 차지했고 민간에서는 양조장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당시 지역 경제에서 양조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양조장은 2013년 경상북도의 산업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다른 예로 인구가 9800여 명에 불과한 울릉도의 향토뿌리기업인 제일두부를 들 수 있다. 1973년 창업해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업체는 46년째 울릉도의 식당이나 마트에 두부를 공급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밖에도 산업유산으로 지정된 코모도호텔 경주, (구)상주백화점, 영주대장간, 예천성당 대죽공소가 있으며, 향토뿌리기업으로 문경새재양조장, 천인제면, 송천정미소 등이 있다. 경상북도는 이들 기업이 경영난 등을 이유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 업체가 정미소, 양조장, 철공 소, 연탄 사업 등 낙후업종으로 도는 환경 개선과 정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홍보물 제작과 국내 전시회 참가 등 판로 확보 개척에 필요한 지원도 병행하고 있 다. 향토뿌리기업은 경상북도가 2013년 전국 최초로 지원 조례를 제정해 지원 근거를 마련했고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약 60곳이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