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 자(호)
- 낙인/운강
- 인물유형
- 무인
- 시대배경
- 조선시대
- 내용
본관은 전주로 1858년(철종 8년) 12월 30일 문경군 가은읍 도태리(상괴리)에서 효령대군의 18대 손으로 기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 과인할 뿐 아니라 힘이 뛰어나 신장 8척의 늠름한 풍채는 일찍부터 장재라 일컬었고 특히 유학과 병서에 조예가 깊었으며, 1880년 상경하여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으로 용양위 부사과 및 선전관을 지낸 바도 있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 행동에 분개하며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청일전쟁 및 갑오경장이 잇달아 일어나 일제는 혁신이란 미명 아래 우리의 정사를 간섭하였다. 일본의 내정 간섭에 통분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였다.1896년 1월 11일 드디어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달아는 적의 밀정인 부정한 관리를 생포하여 농암시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매국행위를 낱낱이 폭로 규탄하고 목을 베고 격문을 날리니 이에 감동한 주민들이 다투어 참가하였다.그리고 2월 1일 유격장이 되어 왜병의 병참고를 공격하고 윤기영과 더불어 문경 평천에 진군하여 조령 일대의 요로를 끊는등 주로 충북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적세는 날로 증강하는 반면 그는 보급이 없는 고군인지라 1896년 4월 끝내는 권관에게 패한 후 유인석과 상의하여, 만주로 건너가 군사를 교육시켜 새로이 일어날 계획을 세우고 소백산에서 7월에 눈물을 머금으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어 단양 산중에 들어가 재기를 꾀하다가 다음해 4월 만주로 건너가 유인석에게 3년간 사사하고 국내로 돌아와 유학 공부에 전념하여 유학적 사상과 조예도 닦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각처에 격문을 날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그 다음해 봄 500여 의군을 거느리고 3도 14개 읍의 무수한 적을 토멸하였다. 1907년부터 1908년 6월 4일 충북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부상으로 체포될 때까지의 활약과 전과를 살펴보면, 7월 황간전투와 8월 문경 갈평대전, 9월 죽령에서, 10월에는 영춘에서 각각 무수한 적을 격파하여 사기와 군성이 전국에 퍼져 각지의 주민이 다투어 의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6월 4일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수천의 대적으로 기습을 받아 선봉장 하한서등 7인이 전사하고 남은 사군도 잇달아 쓰러져 그의 고군분투에도 보람없이 발목에 부상을 입고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이강년이 체포 호송되어 지나는 고을마다 애국 민중들이 그를 바라보며 땅을 치고 통곡하며 숙연히 영송하였으며 입성하자 모든 점포는 문을 닫고 철시하였고 그의 승전을 바라던 관원들은 왜록을 거절, 사퇴하고 모두들 통곡하였다.
그후 그는 수원 일본군수비대를 거쳐 7월 8일 일본군 헌병 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10여일간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있다가 7월 19일에 평리원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매 왜색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 하며 5대 매국 역적과 왜적 섬멸을 역설하였다.
그후 9월 2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아 10월 13일 오전 10시에 형이 집행되어 천추에 원한을 품으며 의열의 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로 죽기에 앞서 일본 승띠의 설교를 물리치고 동지에게 보내는 고결문을 남겼다.
그가 순국한 지 54년만인 1962년 정부에서는 조국에 자주독립에 공이 많다 하여 건국훈장 중창을 추서하였고 그의 유적으로 가은읍 왕능리에 기념비와 문경읍 갈평리에 전승비를 세워 그의 높은 충정을 기리고 생가지에도 표석을 설치하였으며 묘소는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