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전
- 자(호)
- 백순(伯純) (호) 경은(耕隱)
- 인물유형
- 충신
- 시대배경
- 조선시대
- 내용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본관은 벽진(碧珍), 1392(태조 원년)∼1481년(성종11년)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으로 이태조 원년(1392) 자헌대부 병조판서(兵曹判書) 심지(審之)의 아들로 금오산(金烏山) 밑 구미시 형곡동에서 태어나 1481년 89세로 돌아 가셨다.
선생은 일찍이 야은(冶隱)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과 도덕을 닦아 유학(儒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물질을 탐하지 아니하고 의(義)라고 생각 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굽히지 아닌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 하였다.
조선 왕조 5백년간 정치적 변고가 있을 때마다 충정(忠貞)과 고절(苦節)로서 국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아 온 탁월한 인물이 많았지만 단종(端宗) 임금의 퇴위 (退位)로 인한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절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사실이다. 서로가 처지에 따라 사(死)와 생(生)은 달리 했지만 정신은 다같이 사생을 초월한 분들이다. 옛 시에 강개살신이(慷槪殺身
易)하고 종용취의난(從容就義難)이라고 한바와 같이 조용한 자세로 의(義)를 다함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육신과 함께 생육신을 우러러 보는 까닭이 여기 있거니와 생육신 가운데서 경은 선생은 더욱 빛나는 어른이다. 세종 원년에 친시 과거(親試科擧)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서 더욱 학업을 닦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벼슬에 올라 왕조에 대한 간언의직을 맡으셨다. 그후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지냈으며 세조가 국권을 찬탈할 뜻을 품고 황보인, 김종서를 제거하니 이른바 계유정란을 이르킴에 선생은 국정에 뜻이 없어 자청하여 외직으로 물러나 거창현감(居昌縣監)에 부임하였다. 어진 정치를 베풀어 온 국민이 잘 살게 되자, 청백리(淸白吏)로 추앙을 받아 전도의 관운이 매우 형통할 때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춘추의리를(春秋義理) 굳게 지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선산군 고아면 망장으로 돌아와 27년간을 거짓 봉사 거짓 귀먹어리를 빙자하고 매월 초하룻날 아침이면 태양을 향하여 기도하며 영월 단종의 적소에 요배하여 단종을 추모하였고 세조가 있는 서울 쪽으로는 앉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세조로부터 여러차례 출사(出仕)를 명 받았으나 소경과 귀머거리를 빙자하여 거절하였고, 집안 사람들로 몰랐으며 오직 점필재 김종직( 畢齋 金宗直)선생이 찾아오면 흉금을 털어 놓고 종일토록 싫어하지 않았다고 하며 선생의 병이 나으리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점잖은 그대를 보니 마음과 가슴이 탁 트이는 것같소"라고 하였다. 김종
직 선생은 비로소 선생의 참뜻을 알고 얼글을 고쳐 더욱 공경하였다. 또 선생은 가훈이 심히 엄격하여 자제들에게 말타는 것을 금하였으며 "부모가 병으로 누어 있는데 너희들이 스스로 편안하려 하느냐"하였다. 집안의 우물을 이름하여 죽정(竹井)이라 하고, 지당(池塘)을 국담(菊潭)이라 하니 스스로 그 지조를 보인 것이다.
김종직 선생은 경은 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 추앙하여 이존록(彛尊錄)에 "사환하기를 싫어하여 향리에서 퇴거하여 겉과 속이 아무 티가 업속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셨다"고 서술하였다.
숙종께서 선생의 충절을 높이 찬양하야 선산 월암서원(善山 月岩書院) 함안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천 용계서원(永川 龍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으며 정조(正祖)에이르러 이조판서 홍문·예문 양관 대제학(吏曹判書 弘文 藝文 兩館大提學)을 증직하고 정간공(靖簡公)의 시호(詩號)를 내리셨다.
※ 참고문헌 : 삼인록·전고대방·이조실록·한산 이상정 찬 묘갈명, 여주 이우성 찬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