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길재
- 자(호)
- 재부/야은
- 인물유형
- 충신
- 시대배경
- 조선시대
- 내용
해평 길씨로서 중정대부 지금주사 원진(中正大夫 知錦州事 元進)의 아들로 지정 13년 (1353)에 고아면 봉한리(鳳漢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재(再),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고 한다.
선생은 어려서 체격이 청수하고 천성이 영민하였다. 나이 11세에 비로소 냉산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읽고 쓰고 시 짓는 법을 차츰 이해하였다.
1370년에 상주 사록(司錄)으로 있는 박분(朴賁)을 찾아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性理)에 관한 학설을 들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비로소 학문의 진리를 배웠다. 1374년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生員)시험에 합격하였고 1383년에 사마감시에 합격하였으며 3년 후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1388년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나라에서 요동(遼東)을 치려하니 선생은 시를 짓되 "용두산(龍頭山) 동쪽 머리 담은 기울고, 미나리 밭가에 푸른 버들 드리웠네. 몸뚱이야 남들 같이 이상할 것 없건마는 뜻만은 백이 숙제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네"라 하였다.
1389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 제수되었고 1390년 봄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측한 나머지 노모를 받든다는 핑개로 벼슬을 버리고 목은(牧隱)선생을 찾아가 그 뜻을 전하니 목은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 글귀에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라 하였다. 선생은 고향 선산에 있는 옛 집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려 하였다. 꿈에 한 중이 나타나 시 한 구를 부르되" 오랜 친구 모두들 새 몸이 되고" 선생이 화답하되 "천지와 강산만이 옛 벗이로세"하였다. 꿈을 깨어 다음 글 구를 맞추되 "하늘은 웅당 내게 허락하리라 어진 마음 늙지 않아 청춘일 것을"하였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높여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 봉양하는데 모든 것을 손수하였다.
1400년 태종께서 세자로 계시면서 옛날같은 마을에서 서로 학문을 질문하고 연구하여 정의가 매우 두터웠으므로 옛 정분으로 불렀으나 벼슬 길에 나서지 않으니 그 고을 군수가 독촉을 심히하여 견디다 못해 서울에 이르니, 태상박사를 제수하므로 글을 올려 진정하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였사온데 신은 초야의 미천한 몸으로 고려를 섬겨 임금의 은혜를 입었사옵고, 또 벼슬까지 받았사옵니다. 이제 다시 거룩한 조정에 봉사한다면, 명분교화에 누를 끼치는 일이옵니다'하였다 태종이 그 절개를 가상히 여기시어 융숭히 대접하고 그 집안을 회복시키도록 하였으니, 감사(監司) 남구암 재가 시를 지어 주니 "오백년 고려 나라에 선생 한 분 계시거늘 한 시대 공명쯤이야 영화랄 게 있으리까 늠름한 맑은 바람 우주에 가득 불어 억만년 우리 조선 길이길이 소리 나리"하였다. 변춘정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효행을 찬미하고 혹은 절개를 표창하였다.
선생은 심지가 청렴하고 조용하며 세상의 이욕에 팔리지 않고 항상 담백하였다. 1401년 태종이 즉위하신 후 선생의 절의를 존중하고 권장하기 위하여 자손 중에 벼슬을 주어 부르셨다. 아들 사순(師舜)이 부름에 응하여 하직을 올리니 선생은 "임금으로서 먼저 신하를 불러 보는 일은 옛날에도 듣기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 몸으로 임금의 부름을 입었으니, 비록 벼슬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은혜와 이치는 다른 신하와 비교할 바 아니다.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그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긴다면 네 아비의 마음은 이밖에 더 바랄 것 없다"하였다.
선생은 본시 청고하여 충과 효에 마음을 두고 부자의 가법을 지키며 제자들과 경서를 강론하고 도학을 밝히며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분석하고 절충하여 밤이 새도 지친 바 없었다. 중들도 깨닫고 돌아온 자가 수십 명으로 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1419년, 선생의 나이 67세로 병환이 나서 급하게 되니 부인 신씨는 아들 사순을 부르기도 하였다. 선생은 "임금과 애비는 일체다 이미 임금에게 가 있으니 부고를 듣고 오는 것이 옳으니라"하고, 내가 죽거던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하여 상례를 치뤄라" 말이 끝나자 운명하니 세종 1년(1419)이고 향년 67세였다. 금오산 동편 오태에 장사하였다. 영조(英祖) 4년(1728) 시호(諡號)를 충절(忠節)이라 하였으며, 선산 금오서원, 칠곡 오산서원, 금산 성곡서원, 계룡산 삼은사에 향사하고 고려말 포은, 목은과 함께 3신(三臣), 3은(三隱)이라하며 조선 유학의 종사(宗師)이다. 정려를 내렸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참고문헌 : 문인 전중직대부 사헌부집의 지제교 박서생 지은 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