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이언적

이언적

자(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인물유형
기타
시대배경
조선시대

고려시대(高麗時代), 조선시대(朝鮮時代)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천년의 긴 세월(歲月) 동안 경주가 자랑할 것 무엇이 있느냐? 생각하면 한심하다. 그러나 고려시대, 조선시대 천년(千年)을 통해 회재 이언적같은 위대한 학자를 이 경주에서 배출했다는 사실은 가장 자랑할 만 한 것이다.

회재는 조선조 성종 22년 (A.D.1491)에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 양좌동(양동)에서 태어났다. 나이 불과 10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복을 벗은 후에는 외삼촌되는 우재 손중돈(愚齊 孫仲暾)에게로 가서 글을 배웠다. 우재는 후에 이조판서에도 올랐지만 당시에는 외직에 있었기 때문에 회재는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서 공부해야만 했다. 14세가 되었을 때는 벌써 학문의 기초를 다 이루고 그 후로는 조용한 절간에서 홀로 유교의 진리를 터득하는데 전심 전력했다. 외숙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배운 후 혼자서 유교의 성리(性理)를 구명(究明)한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을 그의 행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회재가 24세때 별시(別詩)에 급제했을 때 과거의 시험관이던 김안국(金安國)은 그의 글을 보고 칭찬했다. 관직에 나아간 후로는 경직(京職)과 외직의 요직을 두루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판서, 예조판서, 안동부사,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의정부 좌우찬성(議政府左右贊成)에 까지 이르렀다.

소인배가 물러가고 회재는 다시 관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대립 항쟁으로 당시의 정치판도는 오른 뜻을 펴기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

중종(中宗)의 왕후(王后)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산후에 세상을 떠나고, 문정왕후 윤씨가 들어와서 제2왕자 경원대군을 낳으니 문정왕후의 친정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은 세자를 바꿀 것을 음모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항해서 세자의 외숙되는 윤임(尹任) 일파는 윤원형등을 제거시킬려고 힘을 모우게 되는데 세자를 지지하는 윤임파를 대윤, 경원대군을 옹립할려는 윤원형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중종이 왕위에 있은지 39년에 승하하시고 세자가 대위를 이어 인종이 되니 대윤파가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인종의 사부였던 회재도 묘당에 들어 학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래서 정권이 안정되는가 했더니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시니 정세는 급전하게 되었다. 윤원형은 반대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고 2년 뒤에는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회재등 20여인을 유배시키게 된다. 이래서 회재는 명종 2년(A.D.1547) 강계부에 안치되게 되는데 57세 때의 일이다.

강계에서의 유배생활이 7년째 되던 명종 8년(A.D.1553)에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그러나 명종 21년에는 삭탈되었던 관직이 회복되고 선조 즉위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추종하고 이듬해에는 문원(文元)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 2년에는 문묘(文廟)에 오르게 되니 학문을 했는 사람으로서의 명예가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

생전의 관직이 판서에서 의정부 찬성에 이르렀고 증직이기는 하나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은 유교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립시키는 핵심적인 문제로서 일찍 중국에서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회재와 망기당 사이에 있었던 토론은 더 깊게 우주의 원리, 나아가서 인간의 본성과 도덕의 상관관계를 파고드는 것으로 무려 4차에 걸쳐 논쟁이 거듭되었다.

망기당은 「선(禪)」과 「(儒)」를 종합할려는 입장에 서면서도 오히려 「선」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고 회재는 오로지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시켰다. 회재는 망기당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한 「무」에 마음을 써서 「태극」이 우주 만물의 근본이 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자칫 「허무」에 기우는 잘못을 설파하고 「태극」의 원리가 천하의 대본이 되고 달도가 되며 인간은 이것을 터득하여 도덕, 윤리에 적용해야하며 나아가서 이것이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임을 밝히고 유교적인 실학(實學)을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이론은 퇴계의 학풍에도 영향을 준 바가 컸으며 퇴계의 행장문에 있는 바와 같이 회재로 하여금 도학의 학리적인 면에서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게한 원인은 훌륭한 저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저술은 강계에서 보낸 유적생활 7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많다.

회재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계왕성 개래학(繼往聖 開來學:朱子가 孔子를 평한 말)―즉 옛 성인의 학문과 도덕을 이어 받아 후세의 학자들에게 그 진리를 열어 준 위대한 준재이며 그 존재는 일월처럼 빛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