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
- 자(호)
- 천장/단계
- 인물유형
- 충신
- 시대배경
- 조선시대
- 내용
사육신 하위지(河緯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오직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단종애사를 빚어 낸 사육신의 절의는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일이다. 그들은 세종, 문종의 각별한 고명을 잊을 수 없었고 선왕의 은총과 어린 임금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수양 대군의 불의에 항거하여 자신의 목숨은 물론 일가 친척의 멸망까지 각오하고 일어섰던 것이다. 세조의 갖은 회유책과 몸서리 치는 참혹한 형벌에 있어서도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는 의지는 오래도록 이어갈 것이다.
하위지(河緯池)선생의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中章), 호는 단계(丹溪)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 선산읍 이문동 연봉리(延鳳里)에서 태어나시어 이릴 때부터 형제가 문 밖을 나오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하니 이웃 사람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집현전에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문종 때는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더욱 학문에 열중할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등의 명신들이 수양대군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숭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어 선생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가지 않으니 왕의 독촉이 심한지라, 부득이 상왕복위를 계획하고자 벼슬에 나가 녹봉(지금의 월급)을 별실(別室)에 저장하여 두고 상왕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金 )의 고변으로 인하여 선생을 비롯한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유응부와 더불어 한날 참형을 당하니, 태연 자약한 임종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지 앟을 수 없었으며 그의 연루로 선생의 형 강지(鋼地), 동생 기지(紀地), 소지(紹地), 아들 연(璉), 박(珀)도 참사를 당할 때 역시 조용한 태도 또한 충신 집안의 장함을 여러 사람에게 역력히 보였다.
그의 범상치 않은 생애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 하였으니 그의 집 앞 시냇물이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丹溪)"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선산읍 서쪽 단계천에 단계교가 놓여 있고 거기에 오 리쯤 서쪽에 단계선생의 묘소(선상읍 죽장동 고방산)가 있으며, 비봉산 아래 선생의 유허비각이 있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선생의 교훈은 민족 역사상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숙종 때에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벼슬을 다시 내리셨고, 영조34년(1758) 이조판서를 증하고 충렬(忠烈)의시호를 내리심과 함께 장릉충신단(壯陵忠臣壇) 숙모건에 배향하고 사림이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여 서산(西山) 및 월암(月岩) 서원을 세웠다.
「청구영언」과 「화원악보」에 그의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객산풍편(客散風扁)하고 풍철(風澈)코 월락(月落)할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귀(詩句)를 홋부르니 아마도 소인(小人) 득의처(得意處)는 이뿐인가 하노라.
「정원(田園)」에 남은 흥(興)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계산(溪山)닉은 길로 흥(興)치며 돌아 와서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 참고문헌 : 이조실록 퇴계 이황의 채언록 삼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