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 자(호)
- 왕산
- 인물유형
- 충신
- 시대배경
- 근대이후
- 내용
"의병을 일으키게 한 자는 이등박문이고 의병의 대장은 바로 나다."
이 말은 허위가 교수형을 언도 받은 재판장에서, 재판장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자는 누구며 대장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한 말이다.
허위는 호를 왕산이라 하고 1855년에 선산군 임문동에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났다.
관직을 버리고는 금릉군 부항면 두 대리에서 한 때 살다가 독립운동으로 교수형에 처해져 죽고 유해는 금릉군 월명동에 묻혀 있다.
허위는 7세에<달은 대장군이요 별은 만병으로 따른다>라는 시를 지어 뒤에 8도 의병군을 총지휘할 인품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일본이 국모 민비를 시해하기에 이르자 1896년 조동호, 이기하, 여중룡 등과 김산향교에서상주 선산 김산 등지의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참모가 되었다. 농소면 노곡에 진을 치고 김산군 군기소에서 무기를 거두어 일본군과 싸워 패했다.
흩어진 의병을 다시 수습하여 군렬을 가다듬고 2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에 나아가 일본 수비내를 습격하고 수비대와 우편취급소를 불태웠다.
의병군을 진천으로 옮기려고 무주를 거쳐 행군하다가 고종의 봉소를 받고 해산했다.
방산옹을 따라 진보에 가서 공부하고 있던 중 대신 신기선의 상주로 1899년 3월 고종을 배알하니 "포의 선비로 입시가 불가하여 환병단 참봉으로 임명되고 한 달 뒤에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반판사가 되었다. 의정부 참찬을 거쳐 비서원승의 고관직에 오르니 이등 통감이 궁중을 점거하고 모든 정무를 결재하기에 이르기까지 국정을 간섭하자 관직을 버리고 나왔다.
을사 보호조약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격문을 뿌리다가 일경에 구금되어, 시독혜사(侍讀蕙社) 강원형(姜遠馨)의 상주로 4개월만에 풀려나서 이곳 부항면 두 대동에 들어와 삼도봉(三道峰)을 근거지로 삼남(三南)의 지사들과 연락 기병을 준비하고 있던 차, 고종의 "의거(義擧)라는 두 글자의 의대밀지(衣 密誌)를 받고 경기도로 나아가 임진강 연안을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포천 연천 철원 등지에서 일본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크게 군세가 떨쳤다. 1907년에는 전국 의병대장을 전주에 소집하여 전국 12만 의용군을 통합키로 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 관동은 민긍호, 관서는 방인관, 관복은 정봉준, 호서는 이강년, 교남은 박정무, 경기진동은 권중희가 각각 의병대장으로 부서를 정하고, 외국 공관과 일본군사령부와 통감부에 한국군 재건을 통보하여 한국군 정규준이라 주장하였다.
이들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양주에 집결하니 만여 군사가 모였다. 이들은 서울을 점령하여 통감부를 쳐부수고 일본군사령부를 점령하여 일거에 일본을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허위는 감사병 300여명을 이끌고 한 발 앞서 서울을 향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다다르니, 후속부대가 일본군에게 차단되어 전진하지 못하고 허위군 단독으로 3일간을 버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허위는 임진강으로 돌아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각처를 출몰하면서 게리라전을 펴다가 철원에서 일본 헌병 내 40명에게 포위되어 잡혔다. 허위에게는 25원의 거액 현상금이 걸려있어 현상금을 노린 반역자 박대원 여영조의 밀고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았다.
1908년 10월 21일, 마지막으로 찾은 친척들에게「어버이 장례도 못 치르고 나라의 주권도 찾지 못했으니 효도 충도 아니다.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하고 마지막까지 의연한 자세로 교수대에 임했다.
집행관이 유언은 없는 가고 묻는 말에「주권도 빼앗긴 나라의 몸이 무슨 남길 말이 있겠는가 빨리 죽여라」고 호통쳤다.
교수형이 집행되자 멀쩡한 날에 구름이 모여들고 번갯소기라 요란하더니 교수대가 설치된 뜰가에 섰던 두 그루의 큰 소나무가 졸지에 꺾어지고, 뒷마당에 샘물이 별안간 누렇게 변했다 한다. 소식을 들은 시민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의 부하였던 박상진이 시체를 거두어 산골짜기에 묻었다가 이듬해 5월 지천 방암산에 이장했는데 언제 또 이장했는지 지금은 금릉군 남면 월명동 뒷산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