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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홍익한

자(호)
백승/화포
인물유형
충신
시대배경
조선시대

지금의 봉화군 봉화면 문단리(당시의 순흥 땅)에서 진사 이성(李成)의 아들로 1586년(선조19)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독서를 즐기면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한번 눈으로 보면 기억할 정도였다. 15세에 백부인 병절교위(秉節校尉) 대성(大成)으로 출계(出繼)하여 경기도 평택에서 살았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3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2등으로 뽑히고 1623년(인조1)에 공주정시(公州庭試)에서 문과의 장원(壯元)으로 합격되어 성균관 전적(典籍)이 된 후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7월에 이덕동, 오익등과 함께 조경사(朝京使)로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는데 명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임효유등이 우리 사신의 복식(服式)이 명나라와 다름에 분노하여 승인하지 아니하였으나 거듭거듭 글을 올려 준사(竣事)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때 명나라를 다녀온 모든 것을 「항해록(航海錄)」으로 기록되었는데 대단히 명문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사저으을 잘 견문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이듬해 4월에 귀국하여 그 공과 월해(越海)한 노고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 그리고 고령현감, 성균관 직강(直講), 사예(司藝), 부안현감등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기전에 청나라가 우리 나라를 속국시(屬國視)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보내왔을 때 용골대의 목을 베므로서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여 항소(抗訴)했는데 그 격렬함이 청나라 조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했을 때 최명길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명길등의 주장으로 청나라의 화를 피하고자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잠시 제수(除授)되었다.

그 후 인조는 부득이 주화론(主和論)의 의견에 쫓아 남한산성에서 화의(和議)가 되자 청나라는 기어코 척화론을 주창한 오달제, 윤집과 함께 척화신(斥和臣)3인이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화포공이 그 수위(首位)였다.

1637년(인조15) 3월 평양 두리도(豆里島)에서 결박(結縛)되어 청나라 김한(金汗)의 진영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이 때가 이미 우리나라는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삼전도(三田度)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한 이후였다.

이리하여 화포공은 청나라군에 잡히어 그들의 서울 심양까지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쓴 일기가 그의 유명한 북행론이고, 그해 3월 심양에서 처형당하기까지 나라를 위한 그의 충절이 지극하였고, 청은 온갖 방법으로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지켰고 조선군왕의 신하로서의 기백을 보여주며 흠염히 죽어갔는데 이때가 1637년(인조15) 3월이다.

그리고 지금의 봉화군 봉화면 문단리에 충렬비(忠烈碑)를 세웠고 평안도 평양 즉 공의 병자호란 초에 보외지지(補外之地)로 평향부윤으로 부임했던 곳에 평양사우(平壤祠宇)를 지어 제향했으며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 그리고 본향 영주의 장암서원에 배향했었다.

또한 공이 평생동안 저술한 바가 기천편(幾千編)이나 되나 병화(兵火) 때문에 많이 없어지고 시부(詩賦), 산문(散文)등 약간편과 항해록(航海錄), 척화소(斥和疏), 서정록(西征錄), 북행록(北行論)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화포문집(花浦文集)으로 엮어 보존하고 있다.

그 뒤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增)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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